시간을 걷는 여행 -기차, 도시, 오래된 마을 등 감성적인 여정

[에세이] 겨울 한낮의 멈춰진 시간, 동묘 벼룩시장에서 길을 잃다

봄날 순동이 2026. 2. 17. 15:48

겨울 햇살이 낮게 내려앉은 오후, 나는 종로의 낡은 골목 끝에 서 있었다. 그곳은 1980년대 어느 지점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곳, 바로 동묘 벼룩시장이다. 화려한 빌딩 숲 사이를 지나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의 온도와 소음의 결이 달라짐을 느낀다. 마치 거대한 타임머신을 타고 낯선 과거의 한복판으로 툭 떨어진 기분이다.

 

누군가의 계절이 쌓여있는 언덕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옷가지들이다. 사진 속 풍경처럼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그 '기억의 더미' 속을 헤집는다. 단돈 몇 천 원에 누군가의 한 계절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곳. 손끝을 스치는 거친 코트의 질감과 빛바랜 소매깃에는 이전 주인이 보냈을 겨울의 시린 바람과 어느 따뜻했던 저녁의 온기가 여전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유행이 지나 외면받았던 물건들이 이곳에서는 다시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기억의 박물관

길가에 펼쳐진 좌판들은 그 자체로 작은 박물관이다. 태엽을 감아야 움직이는 낡은 시계, 이제는 사용법조차 가물가물한 빈티지 전자제품, 그리고 누군가의 손때 묻은 장신구들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특히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골목 안쪽 헌책방의 풍경이었다. 책방 앞 켜켜이 쌓인 고서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묵직한 종이 냄새를 풍긴다. 누군가 소중히 여겼을 문장들, 이제는 누런 빛으로 변해버린 그 여백 속에서 나는 이름 모를 이의 고독과 열정을 읽는다. 굳이 무언가를 사지 않아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웅근해지는 기분이다.

 

세대와 국경이 만나는 비밀의 장소

동묘는 이제 어르신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버지가 입었을 법한 구제 옷을 멋스럽게 소화한 젊은이들과, 한국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데 뒤섞여 묘한 활기를 만든다. 투박한 사투리와 서툰 외국어, 물건값을 깎는 흥정 소리가 뒤섞인 이 어수선한 소음은 세련된 백화점의 배경음악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낡고 먼지 쌓인 거리가 누군가에게는 보석 같은 '비밀 장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활력을 되찾는 안식처가 된다.

 

겹겹이 쌓인 문장들, 기다림이 행복이 되는 곳

시장 초입 영광서점을 들러, 안쪽 '청계천 서점'의 빛바랜 간판 아래, 책들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거대한 문장의 벽을 이루고 있다. 누군가의 서재에서 사랑받았을 책들이 이제는 길 위로 얼굴을 내밀고 또 다른 인연을 기다리는 풍경. 그 더미 속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선 서울의 예수를 가만히 집어 든다.

손때 묻은 시집의 책장을 넘기다 또 기다리는 편지앞에 멈춰 선다.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는 시구에 한참 동안 마음을 베인다. 어쩌면 이 골목의 모든 낡은 것들은 누군가에게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조차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갈하게 꽂혀 있지 않아도,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 서 있는 헌책들은 침묵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며

겨울 한낮, 동묘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묻는다. 우리는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소중한 옛것들이 건네는 느린 기다림을 잊고 사는 건 아니냐고. 보물처럼 찾아낸 시집 한 권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속엔 "기다림이 행복이었다"는 시인의 고백이 겨울바람을 타고 따스하게 번져 나갔다.

 

기다림이 익어 그리움이 되는 계절

박순동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낡은 문장 사이에서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잠든 세상 밖으로 빈 길에 뜨는 새벽달처럼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동묘의 겨울은

잊혀진 것들의 이름을 시처럼 불러주며

저물어가는 오늘을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26. 2. 14. 순동. 동묘시장에서 침묵하는 것들의 깊은 울림을 받으며.